아임 파인,
장윤주
삼사 년쯤 된 일 같다. 점심시간에 여직원들끼리 도시락을 먹다가, 누가 우리나라 최고의 모델인가를 놓고 논쟁이 붙었다.
각자 좋아하는 모델이 있었고 정답이 없는 문제지만,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아무도 반론하지 못했다.
“장윤주가 베를린에서 아디다스 쇼 오프닝하는 거 못 봤구나?
하이패션이랑 스포츠 브랜드를 모두 소름 돋게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은 장윤주뿐이야.
그렇게 얼굴이 다양한 모델은 장윤주뿐이라고”
장윤주가 이긴 건데 내가 이긴 것만 같은 이상한 승리감에 빠져들었고,
이후 그녀가 음악 활동을 시작하자 ‘역시!’ 하고 또 한번 감탄했다.
MC에, 예능에, 어디에서도 빛나는 장윤주는 이미 최고의 모델이란 수식어를 넘어서 있었다.
얼마 전에 나온 2집 앨범 을 듣고는 조금 놀랐다.
이 사람, 사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게 아닐까. 혼자 있을 때는 잘 잠들지 못할 정도로 상처가 많은 게 아닐까.
너무나 다양한 얼굴을 가진 장윤주의 진짜 얼굴이 그 속에 있었고, 노래들은 아무것도 덧붙지 않고 ‘여자’로 압축되었다.
“서른 살이 지나,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문득 알았어요. 저 나무도 내가 여자인 걸 알겠지?
금방 스쳐 지나간 이에게도 나는 여자겠구나. 그전에는 여자라는 것이 별로 좋지 않았거든요.
혼자 배낭여행도 할 수 없고 불편하다고 괜스레 움츠러들었어요.
지금은 제가 여자라는 사실이 너무 좋아요. 특히 가까운 사람들에겐 보통 여자이면 좋겠어요”
“서른 살이 지나,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문득 알았어요. 저 나무도 내가 여자인 걸 알겠지?”
장윤주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이어나갔다. 내내 신중하게 말을 골랐지만 그 말들은 꾸밈이 없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그녀였다.
“사실 충격적인 고백을 들은 적이 있어요. 인간 장윤주가 아니라 모델 장윤주를 사랑했던 것 같다고….
반대로 작은 선물 하나도 사주기 부담스럽다는 사람도 있었고요.
너는 톱모델이니까 늘 주목받는 사람이니까, 단정 지으면서 낯선 사람들 속에 밀어두고 전혀 돌아봐주지 않기도 했어요.
전혀 이해받지 못했던 거죠. 조금 특이한 직업을 가졌을 뿐, 보통 여자인데 그렇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나 봐요”
촬영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1900년대에 지어진 작고 아름다운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백 년도 더 된 창틀에 앉아 장윤주는 포토그래퍼와 빛에 대해 조곤조곤 의견을 나누다가,
휴관일이라 화면이 까맣게 꺼져 있는 설치 작품들도 잠시 들여다보고, 해가 막 진 후라 추운 정원에서 오래 포즈를 취했다.
촬영이 다 끝나자 장윤주가 말했다. “밥을 먹어야겠어요. 밥 먹지 않을래요?”
그러더니 정말 맛있게 해장국을 먹었다. 앨범의 대표곡 의 첫 가사
‘나는 평범하죠, 밥도 잘 먹고요’가 생각나는 따뜻한 저녁이었다.
장윤주의 노래들은 소탈한 장윤주처럼 가사와 멜로디에 꼭 알맞은 제목이 붙어 있었다.
과하지도 않고 맹숭하지도 않고 다른 제목을 상상할 수 없이 딱 그 제목이었다. 어떻게 지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목 정하는 거 사실 꽤 어려웠어요. 가사도 어려운 작업이었지만요.
고민하다가 끝내 임시로 붙여 둔 제목이 그대로 제목이 된 경우도 있고요.
<오래된 노래> 같은 경우는 쓰면서 많이 울다가, 다시 쓸까 고민도 했지만
그대로두곤 작곡한 지 가장 오래된 노래라서(웃음) 그렇게 붙였어요”
웃을 때는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진짜로 웃었다. 그렇게 웃는 사람을 본 것이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장윤주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첫번째 앨범도 두 번째 앨범도 겨울 초입에 발표했다. 특별히 겨울에 애착이 있는 걸까.
“그런 시간 좋아해요. 겨울 공기와 석양이 섞일 때, 오늘 촬영 시간처럼요.(웃음)
말랑말랑, 겨울 해가 창문으로 들었을 때 가장 편한 의자에 앉아서 모과차를 마시면서 제 노래를 들어주세요.
혼자만의 일기 같은 걸 쓰면서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저 스스로도 겨울에 나온 음악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캐럴에 묻히기도 하지만 그때만 지나면 1월까지 쭉 이어 듣게 되더라고요”
잠들지 못할까 걱정하다가 진하지 않은 커피를 시킨 그녀는 편안하면서도 진솔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아마도 그래서 MC일 때나 예능 게스트일 때나 부자연스러운 느낌 없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일 테다.
모델일 때도 음악을 할 때도 지켜보는 사람은 마음이 기울고 만다.
“처음에는 주목받는 게 좋았어요. 스포트라이트가 저한테 떨어지는 자리 말이에요. 그런데 점점 더 서포트해 주는 사람들이 멋져 보여요.
가깝게는 유재석 씨라든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주변을 받쳐주는 사람이 더 지혜로워야 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MC라는 자리에 매력을 느끼고 조금씩 더 알아가고 있어요”
완전히 방송인으로 틀지는 못할 것 같다고 수줍게 말했다. 잘할 수 있는 일만 오래 생각해서 고르다 보니 까다롭다는 말도 듣는다고 한다.
아마 사람들이 장윤주를, 특히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장윤주를 더 보고 싶어하다 보니 많은 요청이 있는 듯하다.
장윤주와 다양한 분야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멋진 친구들을 떠올려보았다.
“따로 자주 만나지는 못해요. 매일 뭉쳐 다니고 매일 밥을 먹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못 만날 때는 정말 오랫동안 못 만나요, 각자의 작업 때문에.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도 전혀 어색하거나 한 것 없이 반가움과 신뢰가 막 느껴진달까요.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사람을 만날 때도 마음이 가벼운 것 같아요.
제자리를 열심히 지키지 않았을 때 오히려 사람 만나기가 부끄럽더라고요”
점점 더 장윤주의 일상이 궁금해졌다. 혼자 있는 시간의 장윤주 말이다. 조명도 카메라도 사람들도 없을 때의 장윤주.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은 쉽게 상상이 갔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해요. 독립은 작년에 했는데, 그 전에 부모님과 살았을 때도 분리된 옥탑방에 오래 살았거든요.
일이 끝나고 나면 막 사람들을 만나거나 밤에 약속을 잡거나 하는 타입은 아니에요. 편안하게 TV도 보고, 음식도 해먹어요.
저도 제가 요리를 할 줄은 몰랐는데 막상 해보니 욕심도 나고 재미도 있더라고요.
어제는 김치 부침개도 했고, 소금 약간만 넣은 올리브 오일 파스타도 맛있었어요.
그리고 글 쓰는 거 좋아해요. 일기도 쓰고 다른 것도 쓰고….
원래는 여러 권의 노트에 이것저것을 썼지만 최근 가지고 다니면서 쓰려고 아이패드를 샀어요. 아직 좀 어색해요”
11월부터 시작한 KBS 2FM <장윤주의 옥탑방 라디오>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는데 친근한 진행과 좋은 선곡으로 사랑받고 있었다.
장윤주도 인터뷰 중에 몇 번이나 라디오 얘기를 할 정도로 특별한 애정을 내비쳤다.
사실 매일 방송이 나가는 라디오는 큰 책임이 아닐 수 없을 텐데 장윤주에게 라디오는 어떤 의미일까.
“라디오 안 한 지 1년 정도 되니까 다시 하고 싶더라고요. 사연 받고 사연 소개하고 청취자들이랑 같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어떤 분들이 듣고 계실까 궁금해요. 왠지 제 라디오를 듣는 분들은 대중적인 이미지보다 더 많은 부분을 좋아해주시는 분들일 거 같아요.
음악할 때 저의 모습, 모델 일할 때 저의 모습, 예능을 할 때 저의 모습, 나뉘어 있던 제가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것 같아요.
제 청춘의 시간을 라디오에 잘 표현하고 잘 쏟고 싶어요
장윤주는 실제로 세 자매 중 막내인데, 라디오 사연은 주로 ‘윤주 언니’로 시작되었다.
인터뷰를 하던 나도 자연스럽게 언니라는 말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지난주에도 사인회를 갔었는데 99퍼센트가 여성 팬들이더라고요.(웃음) 예전에는 주로 이삼십 대였는데
폭이 넓어져서 10대에서 어머니 연령대 분들까지 계세요. 나는 여자들이 정말 좋아하는구나, 했어요.
남성 팬들은 앨범을 내면 조금 생기고, 또 속옷 브랜드의 광고 촬영을 할 때 조금 더 생겨요.
근데 두 부류는 약간 다른 사람들인 것 같아요.(웃음) 음악 좋아하는 남자들과 속옷 좋아하는 남자들”
알아갈수록 결이 많고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장윤주의 이름을 검색창에 치면 늘 ‘몸매’, ‘노출’이 가장 먼저 따라온다.
그녀의 솔직한 내면보다 운동법과 식이요법에 관심이 쏠린다. 표현력이 풍부한 아티스트로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세계관을 가진 사람으로서 섭섭할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평소에는 별로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2집 앨범이 나오고 나니까 더 많은 분께 들려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1집은 사실 좀 얼떨떨했었거든요. 그제야 약간 섭섭해지더라고요. 너무 외적인 부분들만 이야기가 되고 음악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무보정 사진, 그런 게 떠야기사가 수십 개 달리고……. 그런데 그게 정말 사람들이 원하는 건지,
아니면 매체가 사람들을 그쪽으로만 계속 끌고 가는 건지 가끔 생각해요. 저한테는 더 보여드릴 게 많은데.
꾸준히 다른 모습들을 보여드려서 저뿐만 아니라 모델이란 직업 자체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어요”
장윤주는 이제 패션모델을 넘어서 더 넓은 의미의 모델이지만, 여전히 후배들에 대해 애틋하다.
특히 스마트폰과 여타 미디어가 발전하면서 모델들이 예전보다 런웨이에 설 기회가 적어진 것이 안타깝다고 이야기했다.
해외의 런웨이는 한 번의 터치만으로 손바닥 안에 있고, 무리해서 컬렉션을 준비하는 국내 디자이너들은 점점 줄어든다고 했다.
“모든 분야가 미디어의 큰 발전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고 있어요. 작은 서점들이 사라지고, CD 사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처럼요.
그런 흐름 속에서 아쉬움도 크지만 받아들일 부분들도 또 있는 것 같아요.
런웨이가 사라진 대신 패션 채널과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이 많이 생겼어요.
다양한 매체가 다양한 모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거죠. 당장은 불안하고 겁나겠지만 조금 더 모델이란 직업에 미쳐줬으면 좋겠어요.
모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부분들이 분명 있거든요. 저도 한참 모델 할 때는 미쳐 있었던 기억이 나요.
매일 런웨이 보고 또 보고, 아트 서적에 빠져서, 이게 세상 최고의 직업이구나 그랬어요.(웃음)
자신만의 표현 영역을 확실히 잡은 다음 밀고 나가는 후배들이 많으면 좋겠어요.
오리지널리티가 모델로서 오래 성숙할 수 있는 키워드인 것 같아요”
나이에 유난히 민감한 업계에서 10대와 20대를 거쳐 30대에 접어들었다.
장윤주에게 성숙이란 말은 남다를 것 같았다.
“모델도 그렇고 디자이너도 그렇고 사진작가도 그렇고, 박수쳐주지 않는 때가 와요. 엔터테인먼트 업계 자체가 그런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며 빛이 더해지는 부분들도 있지만 감각이 떨어지면 바로 도태되죠. 그걸 아니까 20대 때 방황이 더 심했던 것 같아요.
현재에 만족한 적이 없었어요. 멀리에 있는 것, 가질 수 없는 것, 영원한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갈망했어요.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현재, 눈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거든요. 넘쳐흐르던 마음이 조금 간결해진 것 같아요.
꼭 엔터테인먼트 쪽에 계신 분들이 아니라도 20대라면 어쩔 수 없이 고민하실 거예요.
더 마음껏 아파하고 부딪히고 움츠러들지 마세요. 젊음과 가능성이란 크고 값진 무기가 있으니까요”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현재, 눈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넘쳐흐르던 마음이 조금 간결해진 것 같아요”
작업의 핵심 같은 것이 장윤주에겐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물어보지 않아도 대답이 나왔다.
장윤주의 노래만큼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을 지우며 대화가 이어졌다.
“진취적인 사람, 앞서 가는 사람, 오픈된 마인드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리더, 모범이 되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이제 제가 생각하는 모델의 정의는 그래요. 누구에게나 모델이 있잖아요.
꼭 패션이 아니라도 모든 부분에서 한 사람이 줄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장윤주는 마음속에 오래 고여 있었을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다. 진지해지고 진심이 되는 걸 겁내지 않는 이였다.
거기까지 듣자, 오래된 미술관과 해장국집과 카페를 거치며 기분 좋게 부풀어 오른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된 걸 알았다.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시간이 흘러 있었다. 장윤주는 촬영 때는 꼼꼼한 프로였고,
식사를 할 때는 세 테이블에 나눠 앉은 사람들을 웃게 할 만큼 즐거운 사람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엔 모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인사를 했다.
장윤주는 자신을 보통 여자라고 말했지만, 여러 의미로 보통 멋진 여자가 아니었다.
만나기 전에는 솔직히 나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하루만 장윤주의 몸매로 살아보고 싶다고.
하지만 만나고 나니 조금 다른 걸 바라게 된다. 하루만 장윤주의 마음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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