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주, 전종서가 만드는 <종이의 집>
‘E’로운 ‘I’ 장윤주
7년 전 우린 국수 가게에 갔다. 다른 매체에서 일하며 장윤주를 처음 인터뷰한 날이었다. 장윤주는 “당장에라도 그만둘 것 같은 얼굴”이라며 밥이라도 사 먹이고 싶어 했다. 나의 번아웃 고민을 상담하는 주객이 전도된 시간이었다. 그 후에도 가끔 거기에 갔다고, 다시 만난 장윤주에게 말했다. 장윤주는 많은 선의 중 하나인지라 가물가물하다고 했지만 “그래서 잘 쉬다 오셨어요?”라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장윤주의 지난 7년여를 살펴봤다. <베테랑>으로 천만 배우가 되었고, <세자매>로 청룡영화상 시상식에 본인이 소장한 드레스를 입고 참석했다. 그가 진행하는 영화 프로그램 <방구석1열>은 종종 재밌게 봤다. 인스타그램에는 훌쩍 큰 리사가 피아노를 치는 영상이 올라온다. <보그> 화보에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장윤주의 <보그> 데뷔는 1997년 10월호다. 보그 홈페이지(vogue.co.kr)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런 설명이 덧붙었다. “어린아이의 이미지에 가녀린 듯 풍만하고 완벽한 몸을 가진, 그리고 닥종이 인형 같은 독특한 마스크의 새로운 모델의 출현! 바로 이때부터 한국에도 신인류 모델 시대가 시작됐다.” 개인적으론 장윤주가 현대무용을 배워 선보인 2019년 12월호 화보를 좋아한다. 장윤주는 인스타그램에 “이번 촬영은 배우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듯 임하지 않으면 ‘무용수인 척’하고 끝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모델이 예쁜 몸으로 그저 팔다리를 휘젓는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컨셉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준비가 없으면 자기 복제가 이어질 뿐이다”라고 소감을 남겼다. 장윤주는 7년 동안 누구보다 바쁘게 일하며 모델이자 배우, 엔터테이너로 더 확장했고, 개인에서 엄마가 되었다.
이번 <보그> 촬영일에도 밤늦게까지 영화를 찍고 스튜디오로 온 참이었다. 텀블러를 들고 스태프들과 긴 인사를 했다. ‘윤주야’ ‘언니’ ‘누님’ 등 수년째 보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안부를 전하고 농담을 했다. 함께 촬영한 전종서 배우의 대기실에도 먼저 들어가 인사를 건넸다. 둘은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에 함께 출연했다.
언제나 에너지가 넘칠 것 같다고 말하자, 장윤주는 “일할 때는 MBTI의 E, 집에서는 I”라고 말했다. “10대부터 일을 해 하나씩 목표를 성취하며 살아왔지만, 예전처럼 100% 충전해서 돌진하지 못하겠어요. 리사를 낳고는 더욱 나는 에너지를 분출하는 사람인데 왜 이럴까 싶었죠. 엄마가 되면서 다른 개체가 되는 걸까 싶었죠. 이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요.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열심히 하되, 나를 지키기 위해 일과 사적인 시간을 나누기로 했어요. 이젠 괴리가 느껴질 정도로 분리를 잘해요. 스위치를 켰다 껴서, 집과 밖 서로 다른 무드가 되죠.” 장윤주는 쉴 때면 남편 작업실에 자리한 자신의 공간에서 몇 시간이고 음악을 듣고 책을 펼치곤 한다.
장윤주는 이 리듬에 만족하지만 그래도 삶에 활력을 줄 무언가를 계속 찾아나선다. 얼마 전엔 가장 친한 친구인 남편에게 아이디어를 얻었다. “일을 즐기고 도전하길 두려워하지 않는 남편에게 영감을 받아요. 지켜보는 나조차 그가 하는 일이 모두 재밌어 보인다니까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사람이죠. 그와 어떻게 해야 나답고,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종종 상의해요. 그러다 ‘쇼킹’하게 신이 나는 제안이 나왔어요. 장윤주란 이름을 숨기고 익명으로 해보려고요.”
장윤주를 움직이는 또 하나의 프로젝트는 사진집 제작이다. 오랜 친구인 사이이다가 10대부터 40대까지 촬영한 자신의 사진을 추리는 중이다. “일로 작업했거나 목적 없이 기록한 사진까지 전부 훑는 중이죠. 10대, 20대에는 필름인데, 보면서 내가 이렇게 예뻤나, 웬일이야, 대박이야 감탄했어요(웃음). 지금은 디지털 사진을 보는 중인데 양이 보통 아니에요. 하루 대여섯 시간씩 봐도 훌쩍 몇 달이 걸릴 거예요. 고르는 기준은 단순해요. 여기저기서 못 본 얼굴, 감정이 담긴 사진이죠.” 장윤주는 이번 작업을 하며 세월을 생각했다. “사진 중에 누드가 꽤 많아서 제 몸의 변화가 보였어요. 리사를 낳기 열흘 전 사진도 있고, 20대, 30대, 40대의 몸이 조금씩 다르죠. 그들을 사진집에 실을까 생각 중이에요.” 모델은 특히 몸을 관찰하는 직업이지만, 우리도 느꼈던 당혹감일 것이다. 장윤주의 사진집은 자연스럽게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롭게 아름다워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공감과 안심을 전할 것이다.
장윤주는 최근 영화 두 편을 마쳤다. 라미란 배우와 보이스피싱 일망타진극 <시민 덕희>를, 송강호 배우와 여자 배구단의 도전을 다룬 <1승>을 함께 했다. 이들 영화를 묻자 장윤주는 처음 연기 제안을 받은 열아홉 살을 떠올렸다.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때문에 미팅하러 록카페에 갔는데 류승범 배우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나타났어요. 20대 초반엔 임상수 감독님이 영화를 제안한 적 있어요. 찾아간 사무실에 제 포스터가 걸려 있었죠. 이상하게도 모델 일을 하면서 영화 제안이 계속 들어왔지만, 전 패션에 미쳐 있었고 모델 일이 너무 바빠 생각이 없었어요. 예대를 다니면서 연출에 관심을 두긴 했지만요. 그러다가 <베테랑>을 하게 됐어요. 그 작품도 처음엔 거절했는데, 류승완 감독님과 얘기하다가 빠져들었죠. 이후에 이런저런 드라마 제안도 꽤 들어왔지만, 고민이 많았어요. 내가 연기를 해도 될까, 한다 치면 어떻게 전개할까. 그러다 <세자매>를 만났어요.” <세자매>도 처음엔 출연 배우이자 제작자 문소리에게 거절 의사를 어렵게 밝혔다. “함께 시나리오를 읽은 친구가 ‘머리를 탈색하면 어떨까’란 의견을 줬는데, 갑자기 가면이 씌워지면서 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문소리 언니에게 ‘저 탈색하고 한번 해볼게요’라고 다시 연락했죠.” 장윤주는 신인으로 돌아가서 문소리, 김선영이라는 연기 프로와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20대, 30대 연기를 점프하던 시간이 압축돼서 <세자매>에 뻥! 터진 것 같았죠. 영화의 쓴맛 단맛을 스파르타로 공부했어요. 연기를 하겠다고 마음먹기까지 오래 걸렸는데, 이젠 ‘깡’이 생긴 것 같아요. <세자매>가 없었다면 <시민 덕희>도 못했을지 몰라요. 이 작품에선 라미란, 염혜란 언니에게 힐링을 많이 받았어요.”
이들 영화보다 우리가 먼저 만나게 될 작품은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이다. 세계적으로 흥행한 스페인 시리즈의 리메이크작으로, 장윤주는 나이로비 역을 맡았다. 무엇보다 섹시하고 강렬한 나이로비가 어떻게 장윤주식으로 구현될지 기대된다. “그간 작품은 거의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느낌이잖아요. 이번 캐릭터는 모델로서 내가 해온 것들을 신나게 보여줄 수 있었죠. 하면서도 ‘연기 재미있다!’ 했다니까요.” 장윤주는 지난 25년 동안 활성화한 E를 이번에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_
VOGUE. May
- 에디터 김나랑
- 패션 에디터 손기호
- 포토그래퍼 안주영
- 스타일리스트 이보람
- 헤어 이혜영, 유미(조이187)
- 메이크업 황희정, 무진(제니하우스 청담힐)
- 네일 최지숙
- 플라워 하수민(그로브)
- Sponsored by Chlo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