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ody Talk
감각의 제국에서 감성의 바다로의 몸, 장윤주
사진을 찍는다. 이 사진은 내가 열여덟 살 때, <보그>의 데뷔작으로 찍었던 사진의 11년 만의 오마주다.
당시 <보그>의 포토 디렉터였던 사진작가 정용선은 모델들에게 엄하기로 소문난 분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떤 멋진 포즈도 잡지 못하고 얼떨결에 촬영했을 것이다.
머리에 100개의 실핀을 꽂은 채였고 복숭아처럼 부드럽고 수줍은 10대의 몸이었다.
이 단순한 사진은 사자 머리에 백조 같은 룩을 한 <보그>의 화려한 페이지들 속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고,
나중에 서계적인 사진가 스티븐 마이젤의 카메라 테스트 콜을 받게 한 행운을 제공했다(타이밍이 맞지 않자 만남이 이뤄지진 않았지만).
그리고 내 모델 인생 중에서 가장 아끼는 사진으로 남아 있다.
프로 모델로서의 첫 컷이 내 인생의 걸작이라니! 그건 행운일까? 불행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그만큼 예민하고 기가 센 모델이었던 것 같다. 첫 사진을 찍은 후 11년 동안 나는 남들과 다른 모델이고 싶었다.
그래서 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 남과 다르게 보이면서도 최고가 될 수 있는 온갖 포즈와 포스를 연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카메라 앞에 서면 내 안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절제해! 여백의 미든, 절제의 미든, 네가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마. 그냥 독자들이 가슴으로 느끼게 해줘.”
그동안 내 몸도 마음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패션과 모델이라는 화려한 직업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은 내가 여전히 옥탑방에서 산다는 것뿐.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부모님이 사는 집의 꼭대기 옥탑방에서 자고 일어난다.
방문을 열고 나오면 하늘이 보이고 별이 쏟아지는 곳에서 내 감성이 자랐다.
그곳에 살며 첫 사진을 찍고, 첫 책을 내고, 첫 음반을 위한 음악을 만들었다.
모델이라는 세계는 유혹의 세계이며 경쟁의 세계다. 바다만 건너도 개런티 1만 달러가 아니면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해외 톱 모델 인터뷰 기사가 실리고, 케이트 모스의 누드가 크리스티에서 600만 달러에 팔린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런 것들이 내게 크게 자극을 주지 않는다.
9년 차 정도의 모델이 되었을 때는, 반복적으로 옷을 입고, 벗고, 메이크업을 하고 지우고 하는 이 일이 기계적이고 지겹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늘을 향한 사다리처럼, 그동안 내가 올라가기 위해 너무 필사적이었기 때문이다.
최고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세상에서 나는 살고 있었다. 지금은 더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내려 놓기’ 위해서 이 일을 즐기게 된다.
나는 평생 모델 장윤주로 살고 싶기 때문에, 패션 모델 일을 ‘미칠 듯한 열정의 전부’가 아니라 ‘소중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다.
몸에 대한 시각도 변했다. <보그>와 용기 있게 작업했던 누드 촬영과 몸을 석고로 응고시켰던 보디 아트 프로젝트는
‘신이 내린 몸-장윤주’라는 이슈를 만들었지만, 반대로 인터넷의 바다에 내 몸이 좌표 없이 둥둥 떠다니는 결과도 만들었다.
몸으로 표현한 미적 신념이, 단순히 ‘몸뚱이’로 판단될 때의 착잡함이랄까.
재미있는 건, 그때가 아니라 3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 스스로 내 몸이 예쁘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그 시절엔 가슴과 엉덩이가 있어도 여자의 몸이 아니었다. 내가 진정한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향수, 메이크업, 액세서리, 하이힐도 싫어했다. 내가 여자라는 사실보다 ‘남과 다르다’는 사실만 중요했다.
3년 전, 내 가슴과 엉덩이는 마른 몸에 좋은 비례를 만드는 볼륨에 불과했다.
지금은 아기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성스러운 그릇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내 몸이 진짜 여자의 몸으로 변해하는 느낌이다.
배도 도톰해지고 골반도 풍만해지고 내 몸이 달처럼 차고 기우는 게 느껴진다.
어제 몸과 오늘의 몸이 다르고,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여전히 에린 오코너처럼 중성적인 몸을 좋아하지만, 그건 취향일 뿐이다. 나는 지금의 ‘둥글고 여성적인 나’를 아껴주고 싶다.
향수, 메이크업, 그리고 무엇보다 스타일은 내 몸을 위한 선물처럼 다가온다.
예전엔 촬영 후, 바로 옷을 벗어버린 후 “명품이 대체 무슨 소용이야?”라고 반항하거나
반대로 “마크 제이콥스를 좋아해요”라고 위선을 떨면서, 정작 그 디자이너의 옷은 한 벌도 갖고 있지 않았다.
지금은 디자이너의 옷을 입어보면서 내 몸과 대화하는 시간이 즐겁다.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해부학적 메시지가 재미있어 팬츠를 사고,
알버 엘바즈가 사랑스러워 랑방의 트렌치코트와 초록색 빈티지 드레스를 산다. 왜 여기 단추를 달고, 주머니를 만들었을까를 탐험한다.
VOGUE interview
2008. 07
Editing 김지수
Photography 오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