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모든 시간을 위하여

불의를 못 참는 광역수사대와 괴물 같은 재벌 3세 악당의 대결을 그린 영화 <베테랑>은
잘 익은 수박처럼 속 태우는 목마름을 해갈시켜줄 범죄오락액션 영화다. 
이토록 존재 목적은 단순하고 명확하지만 황정민, 유아인, 장윤주의 시간이 하나로 합쳐져 완성된 영화 안에는
세 사람에게서 생동하는 기운처럼 흥미진진하고 엄청난 드라마가 담겨 있다.



황정민, 유아인, 장윤주.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여름의 절정에 찾아왔다. 
모든 사람들이 제 안에 저마다의 시간을 갖고 산다면
각기 다른 능선에 맞춰 살아온 그들의 시간이 긴 순환 끝에 모여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다. 

작품과 쉼 없이 공존하며 시간의 두께를 더해온 황정민은 광역수사대의 행동파 형사가 되었고,
뻔한 논법에 편입되지 않은 움직임을 보이며 성숙기에 접어든 유아인은 안하무인 재벌 3세가 되어
영화 <베테랑>에서 정반대의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영화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명확한 두 남자의 충돌을 이야기의 축으로 삼는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들보다 장윤주의 존재가 가장 경이로울 수 있다. 
유아인이 처음으로 악역 연기에 나선 이 영화는 장윤주에게는 생애 첫 스크린 데뷔작이기도 하다. 
'모델 장윤주' '음악하는 장윤주' 등 다방면으로 재능의 희열을 품어온 그녀가 맡은 역할은 
남자 못지 않은 터프함을 지닌 광역수사대의 홍일점 '미스봉'이다. 
비록 비중은 크지 않지만 영화를 보면 류승완 감독이 캐스팅 단계에서 
"이 영화에서 미스봉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크다"라며 애정을 드러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미스봉' 역의 장윤주는 <베테랑>의 히든카드다. 모델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녀는 배우의 세계에서는 순진무구한 존재다. 
이제 새 출발을 시작했다. 그래서 예측할 수 없고 보편적 잣대로 분류할 수 없다. 영화의 시작을 여는 것도 그녀가 연기한 미스봉이다.
그녀와 서도철이 불륜커플로 위장해 잠복근무를 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출발한다. 
"그 신이 첫 촬영이었는데 정말 재미있게 찍었어요. 처음 목표는 감독님이 원하는 대로만 잘하자는 것이었는데 
'나 왜 이렇게 잘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니까요. 그래서 황정민 선배한테 나와 미스봉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으니 
실제 내 모습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여주면 될 것 같아요,라고 했어요. 
돌아온 답변은 '그게 제일 어려운 연기야, 메소드 연기보다 더 위라고'였지만 말이죠.(웃음)
그때 아무것도 모르니 마냥 좋았던 것 같아요. 그 다음부터는 점점 구렁텅이로 빠지면서...
나중에 열 줄 정도 대사를 해야 하는 장면을 찍을 땐 시험을 치르듯 달달 외웠어요."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황정민, 유아인에 비해 캐스팅이 까다로웠던 건 장윤주였다. 
아이돌을 비롯해 여러 배우들이 미스봉 역의 물망에 올랐지만 류승완 감독과 황정민은 그녀를 적임자로 꼽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생경하지만 새로웠어요. 감독님과 함께 오디션을 봤는데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서 좋았어요. 
우리는 연기를 하는 사람이니까 늘 새로운 것을 보고 싶은 갈증이 있어요. 
연기에 관한 나쁜 습관도 없어서 옆에서 잘 도와주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았어요. 어떻게 됐냐고요?
덜컥 신인상을 받으면 어떡하나 걱정이에요.(웃음)"

황정민의 이런 마음을 몰랐거나 영화에 대한 흥미가 덜했는지 장윤주는 결심을 내리기까진 참 쉽지 않았다. 
"에이, 황정민 선배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못생긴 친구가 한 명 있어야 한다고 해서 날 고집했다고 하던데요,(웃음) 
연기 제의는 그전부터 계속 있어왔지만 고사했어요. 확 마음을 끄는 작품이 없는 데다가 자신이 없었어요.
<베테랑>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시나리오를 봤지만 미스봉역은 내가 아니더라도 잘 어울리는 배우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감독님은 만나봐야 할 것 같아서 미팅을 했는데 황정민 선배가 함께 나와서 너무 놀랐어요. 평소 팬이었거든요. 
황정민 선배는 40대 남자 배우들 중 유일하게 멜로 감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부분이 너무 좋아요. 
그 자리에서 영화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나눴고 황정민 선배와 대본 리딩까지 했어요."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장윤주는 미스봉 역을 연기했고 류승완 감독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멋진 액션도 구사해냈다. 
이 어마어마한 일을 환대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의 솔직담백한 입담 속에는 지레 짐작한 것보다 진지한 의미가 배어 있었다.






늘 희망과 낙관주의를 품고 사는 것 같은 그녀의 시간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 상황에서 이 영화가 왔고 그녀의 마른 마음을 해갈해주었다. 
"그래, 이제 연기에 도전하리라! 이런 마음은 전혀 없었어요. 사실 출연을 고민할 당시 심적으로 굉장히 힘든 상태였어요. 
라디오와 TV프로그램의 진행을 병행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탓에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출발하고 싶었어요. 
혹자는 단면적인 부분만 보고 내가 인기나 돈을 얻기 위해 영화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순전히 새로운 사람들과 즐거운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또 이왕 하는 거라면 뜻 깊은 의미를 보태자는 생각이 들어서
이 영화의 개런티를 3년 전 봉사활동을 갔던 아이티에 기부하기로 했어요. 
운이 좋게도 처음 접한 영화 현장 분위기와 함께한 사람들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영화가 개봉하고 큰 흥행을 거두더라도 
극장에서 내려가면 무척 아쉬울 것 같아요. 축제와 같은 지금의 기분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녀는 영화 출연을 통해 자신의 운동장이 한층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커리어가 <베테랑> 이전과 이후로 나뉠까?
"내가 영화를 찍는다고 하니까 갑자기 영화와 드라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섣불리 하지 않으려고요. 
<베테랑>을 두고 고민을 했듯이 똑같이 고민할 것 같아요.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오달수 선배가 이런 말씀을 해줬어요. 
지금 고민하지 말고 미스봉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한 번 더 해보고, 그러고 나서도 연기에 대한 마음이 있으면 그때 결정하라고. 

사실 <베테랑>을 찍으면서 나는 뭘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혼란을 느끼기도 했어요. 
모델? MC? 방송인? 아니면 미스봉? 정체성에 관한 질문은 스스로에게 자주 하는데 매번 답은 똑같아요. 
아무리 새로운 작업을 하더라도 오래 일을 해온 모델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사람들도 나를 '모델 장윤주로'기억할 거에요. 앨범을 내고 공연을 했어도 내가 음악을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마찬가지로 <베테랑>을 했다고 해서 '배우 장윤주'가 됐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베테랑>을 함께한 장윤주'라고 불러주면 좋겠어요.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녀가 영화 현장에 잠시 머물다가 옛 애인의 미소처럼 슬그머니 빠져나가지 않길 바란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꿎은 힘을 쏟지 않으려는 그녀의 태도를 보면서 
이 대단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시간의 자연스러운 지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윤주는 커리어의 탄력과 더불어 '여자 장윤주'로서의 삶에 변혁에 가까운 변화를 맞이했다.
"늘 여자 장윤주로서의 삶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에 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고
그 과정에서 삶의 버팀목이 되어줄 사람의 중요성을 깨닫고 결혼을 했어요. 
여자 장윤주로서 정말로 하고 싶은 것에 대한 고민은 계속하고 있어요. 
무엇이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여자로서 내가 행복했을 때 좋은 에너지가 발휘된다는 것은 분명해요. 바로 오늘처럼 말이에요."





<BAZAAR>
2015. 08

Editor 이미림, 김영재
Photographer 김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