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칼럼
1부. 소녀, 모델이 되다!

깡마른 체구의 조그마한 동양의 소녀가 세계를 호령하는 톱 모델이 되기까지. 
그리고 패션과 방송, 음악을 넘나드는 만능 엔터테이너로 성장하기까지. 
장윤주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의 자리에 섰다. 
세계 속의 자랑스러운 한국인, 그러면서도 우리 곁에 소탈한 친구로 다가온 장윤주.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편집자 주




안녕하세요. 장윤주 입니다.

스타칼럼을 통해 제 이야기를 직접 들려줄 수 있게 돼 기쁩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로 모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지금부터 장윤주의 진솔한 이야기, 시작합니다!




소녀, 모델을 꿈꾸다

제가 처음 모델이라는 단어를 듣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수학선생님을 통해서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마르고 허약해서 늘 길고 가느다란 바늘, 실 등으로 놀림을 받았어요.
그렇게 집에 온 날은 속상해 하며 엎드려 울곤 했었죠.

중학교 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교복치마 아래로 보이는 다리를 보고 놀리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런 저의 마른 다리를 보고 유일하게 칭찬해 줬던 분이 바로 수학선생님이셨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넌 다리도 길고 참 예쁘구나. 얼굴도 작고 동양적으로 생긴 게 나중에 커서 모델하면 좋겠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때부터 제 별명은 ‘모델’이 됐고. 1년 사이에 키가 무려 10cm가 자랐어요.
처음엔 관심도 없고 생소했던 그 별명이 지금의 장윤주를 만든 시작이었습니다.

제겐 두 명의 언니가 있습니다. 지금은 피아노 선생님을 하고 있는 큰 언니에겐 음악을,
둘째 언니에겐 패션과 미술을 배우게 됐습니다. 특히 꾸미기를 좋아하는 둘째 언니의 방에는 늘 잡지책이 있었는데
처음으로 일본 잡지를 보게 되면서 모델을 만나게 됐어요. 점점 더 ‘모델’이라는 별명은 제게 꿈이 됐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모델이 되고자 하는 절 반대하셨어요. 어머니를 1년간 조르고 설득해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신사동의 작은 차밍스쿨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 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날 차밍스쿨 원장님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자장면을 사주셨어요.
아직까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엄마의 빨간 재킷을 입고. 12살 소녀 윤주.
 

소녀의 좌절, 그리고 도전

항상 방과 후면 모델학원에 갔습니다. 모델이 된다는 것은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세를 교정 받기 위해 3달간 발레 슈즈만 신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시작한 다른 친구들은 이미 하이힐을 신고 연습하고 있을 때
저는 키도 작고 어리다는 이유로 계속 발레 슈즈를 신어야만 했습니다.

처음으로 하이힐을 신고 걷는 연습을 했던 때. 비틀 비틀 누구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던 제 모습이 생각납니다.
다른 친구들 보다 더디기만 했던 연습생 시절, 모두들 오디션에 붙어 프로 모델들과 무대에 설 때에도 저는 구경만 하던 소녀였습니다.
그 당시 172cm이었던 저는 높은 천장만 보면 점프를 해 키가 크기를 소망했으나 더 이상 자라지 않았습니다.
무대에 설 수 없었던 저는 집 앞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무대 삼아 혼자 음악을 들으며 걷곤 했습니다.

그렇게 학원에 들어간 지 2년이 될 무렵, 모델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과 고민으로 꿈을 포기하게 됐습니다.
엄마는 그런 제가 안타까웠는지 운동을 체계적으로 해보면 어떻겠냐고 권하셨고, 헬스 PT와 수영 강좌를 듣게 됐습니다.
그리고 운동만큼 열심히 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국내외 패션잡지를 읽고 또 보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패션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올림픽 공원에서.


운동에 전념하다 보니 어느 샌가 없던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넌 모델이 될 수 없어. 부족해’라고만 하던 원장 선생님의 말씀은 더 이상 절 좌절시키지 않았어요.
하늘이 제 기도를 들어주셨을까요? 97년 서울 컬렉션 오디션에서 당당히 진태옥 박윤수 한혜자 선생님의 뮤즈가 됐고
오프닝과 피날레를 장식하며 누구보다 멋지게 첫 데뷔 쇼를 치렀습니다.

단점으로 지적받던 저의 작고 동양적인 매력이 오히려 크게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 당시 세계 패션계는 저와 같은 작고 여린 소녀 모델들이 인기였고 오리엔탈리즘 열풍이 불었습니다.
나와는 정 반대로 흘러갔었던 시대의 흐름이 행운처럼 나를 향해 왔던 것이지요.

컬렉션 이후 오브제 강진영 선생님의 카탈로그를 비롯해 스톰 쥬크 ENC 국내 패션 광고를 섭렵했습니다.
저의 첫 패션 화보는 보그 코리아가 됐어요.
지금은 더블유 매거진에 계시는 이혜주 편집장님이 보그 코리아의 수석 에디터로 있을 당시였습니다.
이혜주 편집장님과 1대 패션 사진작가 정용선 작가에 의해 제 얼굴을 세계 패션계에 알리게 됐습니다.


가장 아끼는 한 컷. 아마 이 컷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다.
이 사진으로 98년 뉴욕으로 가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당시는 지금처럼 국내 패션 사업이 체계적이지도 않았고 IMF라는 경제 위기에 학생신분으로 비자를 받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죠.
6개월의 기다림 끝에 비자를 받고 홀로 뉴욕을 가게 됐는데요. 모든 것은 낯설고 에이전시와의 계약부터 일상생활도 힘들었습니다.

처음 저에게 러브콜을 보낸 세계적인 사진작가 스티븐 마이젤의 스튜디오를 방문하기로 한 그날도 시간 약속을
2시간이나 늦게 되는 실수를 저지르고 결정적으로 저의 뉴욕 에이전시 매니저의 욕심으로 그를 따라 이중 계약을 하게 되면서
미국에 간 지 3개월 만에 어렵게 받은 워킹비자가 취소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후 저는 미국 땅에 당분간 들어가지도 못하게 됐고. 당시 한국 나이로 19살이던 저는
처음으로 모델일과 사람들에게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은 내 맘같이 않구나.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때를 생각하면 이루지 못한 첫 사랑과 같은 아련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데뷔하자마자 세계 패션계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모델 장윤주라는 사람의 무한한 가능성과 열정을 볼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뉴욕에 처음 갔을 때. 모든 것이 낯설지만 꿈으로 가득했던 19살의 나.


소녀, 그리고 쉼표

저는 잠시 모델 활동을 쉬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학업을 다시 시작하면서 서울예대 영화과에 진학했습니다.
당시는 찍히는 사람이 아닌 찍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학교생활을 하면서 ‘나’라는 자아를 찾게 됐습니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고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던 음악 역시 실용음악과 정원영 교수님의 수업을 청강하며,
그때 만난 친구에게 피아노를 1년간 배우는 등 진지하게 음악의 열정을 표현하는 시작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모델 일도 다시 자신감을 찾게 되고 낮에는 학업과 모델 일을 밤에는 음악의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인도네시아 론복에서 티없이 맑은 동네 아이들이 촬영을 구경하고 있다. 

기본나라 중 가장 좋았던 곳은 아프리카였다. 1년간 머물 집을 알아보기도 했다.
아마도 사진작가 박지혁과 함께라 더 그랬던 것 같다. '모델과 사진작가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2003년 1월 케냐에서.


닥치는 대로 해외 출장을 다니며 자유로운 20대를 보냈습니다. 마치 집시처럼 살았다랄까요?
오늘은 아프리카 내일은 스페인 다음에는 파리, 인도 30여 개가 넘는 다양한 나라를 다니며
내 안의 꿈틀대는 감성과 끼를 마음껏 쏟아내며 살았습니다.
그냥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그렇게 20대를 지냈습니다.

2005년 친구들과 함께 냈던 여행 에세이 CmKm에서는 글과 저의 첫 싱글 앨범 ‘fly away’를 내기도 했습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습니다. 싸이월드 음원차트 재즈부분에서 1년간 1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니까요.
곧이어 2006년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씨와 함께 낸 ‘스타일북’도 12만 부의 판매를 이루며 중국과 대만에 수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모델 외에 작업과 표현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아,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더 구체적으로 하기로 하고요. ^^ 오늘은 모델 이야기를 더 할게요. 


촬영할 땐 음악이 참 중요하다. 음악에 따라 본능적으로 그 감각을 따라간다.

표현하기 위해, 나는 채워져야 한다.


소녀, 모델을 이야기하다

음... 저는 지금 모델 후배들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는데요.
그러다 보니 모델이라는 직업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됐고 그들의 친구이자 선생님이 됐습니다.

저는 패션모델을 꿈꾸는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모델은 표현하는 직업입니다.
그리고 의식주 중에 의를 뜻하는 ‘패션’은 시대의 흐름을 가장 빠르게 대면하는 문화입니다.
그 문화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전 수퍼 모델 코리아’에서 모델들을 인터뷰할 때 ‘톱 모델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세요?’라고 질문하면
“워킹 연습과 다이어트”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보면 조금 안타깝습니다.
대중들이 모델을 봤을 땐 가장 중요한 것이 몸매와 키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어떤 분야든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보이는 것만 보게 되니까요.
하지만 패션모델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보통 사람들과는 생각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델은 감각적인 직업입니다. 순발력과 센스를 요구하는 순간의 마찰과도 같습니다.
반짝이는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그 순간 작가와 모델은 마음이 통해야 해요.
디자이너는 모델을 보면서 영감을 얻고 그러기 위해 모델은 계속해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많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질문하고 잘 놀고 잘 먹고... 그래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죠.


내가 좋아하는 한 컷. 사이다의 사진은 건조한 감동이 있다.
 
동양의 프리다 칼로. 멋진 누군가의 삶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 또한 재미난 작업이다.
  

제 경우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 모델 일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표현의 영감이 책과 영화 인테리어 일상생활의 작은 소품일 수 있듯 말이죠.

모델은 뮤즈이고 아티스트예요. 모델을 너무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 같지만, 모델은 멋있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해요.
적어도 그 무대에서만큼은. 그러기 위해 건강하게 다져져야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사랑하고 자신감이 필요한 것이죠.
짧고도 반짝이는 그 순간을 100%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만이 기억될 거예요. 

모델을 비롯한 표현하는 직업들이 다 그렇지만 나만 할 수 있는 것. 나만의 컬러.
그 누구도 대체 할 수 없는 그 무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패션모델에 미쳐 있었습니다. 최고의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자부하며 모델의 길만 고집했었죠.
그런 제가 방송을 통해 대중들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게 되고 지금은 음악과 라디오 진행을 하면서 목소리로 여러분을 만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뭘 하던 대중들에게 저는 모델 일거라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모델로 활동했고 또 모델로 알려졌으니까요.
저는 ‘패션모델’로 데뷔 했지만 지금의 저는 ‘모델’ 장윤주가 돼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지난 포토폴리오를 한 곳에.
 

제가 생각하는 모델이란 이렇습니다. 진취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앞에서 끌어 주는 리더.

그야말로 모델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 삶이 누군가의 모델일 수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제가 제 삶의 모델이고 싶습니다.
너무 무겁게 그 짐을 짊어지기 보단 제 스타일처럼 자연스럽게, 그렇게 삶을 만들고 싶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요. 다음 편에서는 저의 음악과 방송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많이 기대해 주시고요. 우리 곧 만나요. 고마워요. ^^ 




글 장윤주
편집 황용희 국장 (이슈데일리)